Posted in

철학이란 무엇인가? (2/2)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탈레스는 천문학에 열중하여 하늘을 쳐다보다가 우물에 빠졌다. 트라키아 출신의 재기발랄한 하녀가 이것을 보고, 하늘에 있는 것을 알아내려는 데 너무 열중하다가, 바로 자기 발밑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탈레스를 비웃었다. 그런데 이러한 야유는 철학을 하면서 사는 사람에게는 적절한 야유이다.

실제로 이런 사람은 자기 이웃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며, 자기 이웃이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 이런 사람은 공동 생활을 하는 곳이나 재판소 같은 곳이나 또 다른 곳에서 자기 발밑에 있고 자기 눈 아래 있는 것에 대해서 말을 해야 할 때에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우물에 빠지고 온갖 어려움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들의 이런 것을 보면, 트라키아 소녀들만이 아니라 웃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감각세계, 일상경험, 확립되지 않은 견해들로 싸우는 세계 속에서 철학자는 무능하지만, 어차피 그런 구체적인 세계 속에서 치고받는 사람들은 동굴 속의 사슬에 묶여 그림자만 보고 있는 자와 같다.

우리가 동굴 속에서 한 쪽 벽만을 보도록 묶여 있고 우리 뒤에는 불이 타고 있으며 동굴 입구 밖이 진짜 세계라고 가정해보자. 동굴 안은 일상적 경험이 이루어지는 감각세계 또는 현상 세계이고, 동굴 밖은 오직 이성을 통해서만 알수 있는 진짜 세계, 본질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다. 동굴 안에서 우리는 이데아의 그림자들만을 보면서도 그것들이 실재들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 접하는 현실세계는 이데아의 모방이나 복사에 불과하다. 진짜 세계, 이데아의 세계를 파악하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정립된 지식 체계, 즉 에피스테메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후로 철학은 지식을 찾아내기 위한 각축장이 된다.

‘확고한지식’을 의미하는 episteme를 어원으로 갖는 인식론(認識論, epistemology)이 서양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서양철학의 최고 열정은 진리가 된다. 쉼 없는 진리의 탐구가 철학을 발전시킨다. 과거에 정립된 진리의 한형태는 다음번에 정립된 진리의 형태에 의해 전복되거나 초월된다. 각각의 철학자는 다음 철학자를 비판하고 넘어서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진리의 발견과정을 입증해야 하고 발견된 것들을 체계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이제 철학에서는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으로 의심, 개념의 정의, 논리학, 추론, 변증법 등의 다양한 수단이 동원된다. 이 모든방법이 동원되어 지식을 다투기 때문에 서양에서 철학은 논쟁적이다. 이런 과정이 서양철학의 역사다.

모든 분야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철학의 본질, 철학자의 태도는 서양 철학사에서 일반적이다. 칸트는 “배울 수 있는 철학은 없다. 단지 철학하기를 배울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칼 야스퍼스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에서는 질문이 해답보다 더 본질적이다. 모든 해답은 새로운 질문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을 무너뜨리겠다는 데카르트의 영웅적인 결단은 서양에서 철학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유년기에 내가 얼마나 많이 거짓된 것을 참된 것으로 간주했는지, 또 이것 위에 세워진 것이 모두 얼마나 의심스러운 것인지, 그래서 학문에 있어 확고하고 불변하는 것을 세우려 한다면 일생에 한 번은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전복시켜 최초의 토대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몇 해 전에 깨달은 바가 있다.”

마치 무(無)로부터 지식을 창조할 정도의 새로움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창출하겠다는 결단이 데카르트의 철학적 출발점이다. 게다가 의심은 실제 행동과 관련된 것이 아닌 이론적 의심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의심을 해도 된다.

“오늘 나는 나의 의혹에 모든 것을 허락할 수 있다. 지금 문제되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단 성찰하고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계획은 확고하고 불변하는 토대 위에 지식 체계를 세우는 것이다. 지식은 잘못 확립된 토대 위에 세워져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것만을 제공하는 거짓된 견해와 대립되는 것이다. 근본적인 의심의 방법을 통해 과거의 전통을 그토록 무너뜨리고자 했던 데카르트는 지식 위주의 그리스 철학 전통을 다시 취한다.

지혜를 지식과 동일시한 소크라테스(플라톤)가 강조한 대립, 즉 “확립된 지식 체계”(episteme)와 “변형 가능한 견해”(doxa)의 대립을 다시 취하는 것이다. 이런 점은 서양철학이 실천을 도외시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적으로 이론과 실천을 분리하여 생각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철학은 확실성을 추구하는데 있는 것이다. 확실성은 지식이고 진리이다. 진리와 지식을 획득해야 지혜에 도달할수 있는 것이다.

‘지혜에 대한 사랑’, ‘지식을 통한 지혜의 추구’라는 의미의 ‘철학’을 동양 사상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가? 동양의 영원한 스승인 공자는 의심하거나 선행 철학을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과거의 앞선 사례를 따르고 동의하겠다고 주저 없이 선언한다. 공자의 순응주의적 태도는 철학하는 태도가 아닌 것인가? 공자는 서양의 철학 개념에 그토록 본질적인 요소인 질문을 던지지도 않는다. 아마도 서양의 ‘철학’이라는 학문에 해당하는 동방의 용어는 단순히 ‘학(學)’일 것이다. 서양도 동양도 책과 배움을 중시하는 문명이다. 뺷논어뺸를 여는 문구가 바로 ‘학’이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이 문구는 질문인 것 같지만 실은 자연스러운 동의를 구하고 있다.

서양철학에서 자주 발견되는 당혹스러운 질문, 논쟁적인 의문을 공격적으로 던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학의 뜻을 살펴보면 확인된다. 학은 배움, 모방, 훈련 등의 의미를 갖는다. 주자가 해설하듯이 “학이란 말은 본받는다는 뜻이다.” 서양의 철학에서 그토록 소중하게 여겨지는 사유의 방식인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서양에서 철학자의 이미지는 ‘쉽지않은 사람’이다. 절대로 쉽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 서슬 퍼런 비판의 칼날을 갈고 있는 사람, 예리한 질문을 퍼붓는 사람, 완전히 이해되지 않으면 수용하지 않는 사람이 철학자의 이미지다. 그러나 공자는 학을 통해 과거의 사유와 단절하거나 그것에 도전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자는 과거의 사유를 이어가고자 한다. 분란을 일으키기보다는 과거의 사유를 따라간다. 과거의 사유에 담긴 결실을 익히는 데서 기쁨을 찾는다. 당연히 공자의 학은 논쟁적이지 않다. 공자에게 학은 서양의 경우처럼 반대하는 것, 논박하는 것, 맞서는 것이 아니다. 학은 기존의 것을 비판하고 부정함으로써 독창성을 가치있게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학은 모험과 위험을 무릅쓰는 도전이 아니다. 오히려 학은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가운데 이미 진행 중인 과거의 운행에 합류하고 그것을 더 멀리 이끌어 가는 것이다. 만물이 멈추지 않고 운행하듯이 과거의 지혜도 쉼 없이 축적되어왔다. 과거의 지혜를 익히고 전하는 것, 이것이 학이다.

학의 이런 의미는 학에 이어서 등장하는 ‘습’(習)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한자 習을 보면 새의 깃털이 있다. 습은 새의 날개짓이다. 주자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습은 새가 자주 나는 것이니, 배우기를 그치지 않음을 마치 새새끼가 자주 나는 것과 같이하는 것이다.”

익힌다는 것은 거듭해서 무젖게 하는 것이다. 즉 몸에 스며들고 배어들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학습’이란 단지 지식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배운다는 것은 일상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지식이 없는 사람, 배우지 않은 사람도 현명한 사람들, 부모, 통치자, 친구에게 의무를 다한다면 배운 사람으로 여겨져야 한다.

“어진 사람에게는 낯빛을 편히 바꾸어 어질게 대하고, 부모 섬기기에 진력을 다하며, 군주는 온몸을 바쳐 모시고, 친구를 사귀면서 말에 신의가 있다면, 비록 배우지 못했어도 나는 반드시 배운 사람으로 대할 것이다.”

일상의 삶, 사회생활 등에서 의무를 다하는 것은 배움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일상과 사회에서 의무를 다하는 것, 즉 예를 지키는 것도 배움의 차원이다. 달리 말하면 중국에서 철학은 고립된 상태에서 홀로 사유하는 정신적 행위가 아니다. 옛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학이다. 서양의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강조되는 것처럼 철학적 사유는 놀라움에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진리의 폭로도 발견도 아니다.

동방에서 상식처럼 회자되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떠올려보라. “옛 것을 잊지 않고 새 것 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 철학자는 한 체계의 창조자도 아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를 앞선 것들에 의존되어 있다. 공자를 유학(儒學)의 설립자라고 하지만, 실상 공자는 옛 것을 전(述)하기만 하고 창작(作)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공자의 ‘학’은 서양의 철학 개념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이미 헤라클레이토스는 단절을 시사했다. “부모의 자녀로서 행동하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독자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철학자인 것이다. 모든 것을 전복하겠다는 데카르트의 선언을 기억하자. 중국에서 사유한다는것은 전통과 유산에 합류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공자는 다른 사람을 논박하지 않는다. 즉 자기 생각의 독창성을 통해 자기의 관점을 타인의 관점과 차별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사유 속에 다른 모든 관점을 화해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공자는 만물의 운행처럼 이어져오는 과거의 전통을 단절시키지 않으려고 심지어 말도 삼간다. 서양에서 말이 없는 철학이 가능한가? 로고스(logos) 자체가 말이란 뜻이다. 진리를 다투기 위해 논쟁해야 하고 언어는 논쟁의 본질적 수단이다.

서양철학은 진리를 말하기 위해 말하는 반면, 공자는 말하는 것을 피한다. 최소한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집요하게 침묵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자기만의 진리를 주장하듯이 무엇인가를 고집하는 것은 이미 편협한 관점이다.

그렇다면 ‘철학’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서양적 방식으로 “지식을 통한 지혜의 추구”나 “진리의 추구” 등으로 철학을 정의하는 것은 다소 좁은 관점이다. 그러면 철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지식과 삶을 모두 잡아야 한다. 모든 학문이 그러하듯이 철학은 분명 지식을 추구한다. 그러나 철학은 동시에 지식과 합치하는 삶의 방식을 구해야 한다. 여기서 지식은 개별적인 사물이나 국면의 지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서양에서 건 동양에서건 철학은 세상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추구한다. 여기서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관점을 우리는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이라고 명명하자. 물론 형이상학이나 존재론도 ‘비록소비아’가 그랬듯이 서양 개념의 번역어다. ‘형이상’(形而上)이라는 말은 뺷주역뺸에 등장하지만 일본학자가 서양의 metaphysica를 번역하려고 ‘학’을 첨가하여 만든 단어다.

존재론도 서양의 ontologia의 번역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나는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에 대해서 너무 전문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소박한 관점에서 접근하려고 한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세계에 대한 전체적 관점 또는 입장 정도로 이해하면 좋겠다. 뺷대학뺸에서 말하는 ‘사물에 대한 탐구가 앎에 도달한 상태’, 즉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완수된 상태 정도를 의미하면 될 것이다.

앞에서 ‘철학’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설명했는데, 그 중에서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면 적절한 형이상학(존재론)의 의미를 규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근본 원리”를 통해 얻은 “세계관” 정도로 이해하면 좋겠다. 그러나 세계의 근본적 의미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형이상학을 토대로 삶의 방식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삶의 태도를 규정하는 작업은 윤리학 또는 도덕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물론 윤리학과 도덕에 대해서도 여기서는 전문적인 설명은 피할 것을 제안한다. 전문가들이 윤리학과 도덕을 구분하는데 이것도 극히 서구적인 구분이다. 예를 들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윤리학(ethics)이고 의무를 따르는 것은 도덕(moral)이라는 식의 구분이 있는데, 여기서는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삶의 방식을 정립하는것 정도로 이해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철학은 형이상학(존재론)과 윤리학(도덕)의 종합으로 정의해도 무방할 것이다. 만일 세계/세상에 대한 전체적 관점이 서고 그에 따라 삶의 방식을 정한다면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아의 정립 또는 자아의 실현이 될 것이다. 또는 사전적 의미에서 제시된 ‘인생관’이 섰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지나치게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구원” 또는 “안녕”의 방식을 규명하는 것이 철학의 작업이다. 세계 전체에 대한 관점을 세우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을 실행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다.

따라서 철학을 하기 위해 반드시 ‘진리’를 강조할 필요는 없다. 동서양의 철학 전통을 모두 고려할 때 진리나 지식에만 치중한다면 철학에 대한 포괄적인 관점을 놓칠 우려가 있다. 동양의 사상이나 서양의 사상 모두 나름대로의 일관성을 가지고 있고, 그런 일관성이 있는 이유는 각기 세계를 바라보는 입장이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사상이 일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형이상학과 윤리학이 종합된 주요 사상체계를 살펴봄으로써 철학 입문자들에게 삶의 태도를 정립하는 방식을 제시하려고 한다. 철학은 지식의 추구이지만 철학적 지식은 삶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확고한 세계관을 토대로 삶의 방향을 정립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철학의 종합적 목표다.

[다른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