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우선 ‘철학’이란 단어 자체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학문 용어가 그렇듯이 ‘철학’은 한자들로 구성되 어 있다. 전문적인 철학사전이 아닌 일반 사전은 보통 두 가지 정도의 의미를 제시한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 철학(哲學)
-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인생관, 세계관, 신조 따위를 이르는 말
첫 번째 의미는 하나의 학문으로서 ‘철학’이 탐구하는 내용을 나타낸다. 철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 “삶의 본질”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삶의 본질”이라는 표현은 삶을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고 답하려는 철학의 관점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사전적 의미를 봤을 때, ‘철학’은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의 의미와 삶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밝히려는 학문이다. 포괄적인 의미가 담긴 나름대로 괜찮은 정의다.
다만 몇몇 문제가 남는다. 우선 이런 학문이 왜 “철”학인가? “경제학”은 경제를 연구하고 사회학은 사회를 연구하므로 이 단어들은 연구 내용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哲’은 무슨 의미인가? ‘철’은 ‘밝다’, ‘슬기롭다’, ‘알다’ 정도의 의미다. 밝음을 연구하 는 학문? 앎을 연구하는 학문이란 뜻인가?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철학’은 단지 연구하는 학문인가? 인간과 세계의 근본원리, 삶의 본질을 잘 연구한 사람은 그래서 좋은 사람인가?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우리 사회만 보아도 많이 배운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행은 대단한 수준인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여하튼 철학을 인간과 세계의 근본원리, 삶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만 정의하면 철학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삶 자체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아마도 두 번째 의미가 이런 문제점을 어느 정도 해명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두 번째 정의를 다시 음미해보자.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인생관, 세계관, 신조 따위를 이르는 말.” 철학의 이와 같은 의미는 일상생활에서 사용될 뿐 아니라 언론에서도이런 의미로서 ‘철학’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확고한 기준을 가진 상태를 말할 때‘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어르신들은 요즘 젊은이들이 철학이 없다고 한탄하면서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훈계를 하기도 한다.
망나니처럼 사는 사람을 비판할 때도 ‘저 사람은 철학이 없어서 그래’라고 말한다. 국정 운영이 혼란할 때 대통령의 ‘국정
철학’이 절실하고, 정치판이 엉망일 때 ‘철학이 부족한 국회의원들’ 때문이고, 경제가 안 좋을 때 ‘경영 철학’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철학’이 표현된다. 나아가 어떤 개별적인 사안뿐 아니라 삶과 세계 전체에 대한 정확한 입장이 서있을 때, 우리는 ‘철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두 번째 의미에서는 ‘연구’나 ‘학문’ 따위의 뜻이 명확히 포함되어 있지 않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단지 연구가 아니라 삶의 방식 또는 태도 자체와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다만 ‘경험’에서 얻은 관점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다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여기서도 ‘哲’은 허공에 붕 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특정한 분야에 ‘밝은’, 그래 서 ‘슬기롭고’ 잘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철학이 있는 사람’이 인생을 잘 가꾸어가고 있는 사람인가?
위의 두 의미를 모두 종합할 때 ‘철학’의 의미가 어느 정도 드러날 것이다. 잠시 후 두 의미를 연결시킬 것이다. 그 전에 ‘철학’이란 단어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이 있다. 요즘은 좀 덜 한 것 같기도 하지만, 철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아직도 많은 분들이 “점 볼 줄 아느냐?”라고 묻곤 한다. 아마도 이는 꽤 많은 사람들이 ‘철학’이라는 것을 인생 자체에 대한 고민과 답의 의미로 이해하거나, 도처에 발견되는 ‘철학관’이라는 명칭이 각인되어 ‘철학’과 점(占)의 상관성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과 점(占)은 관계가 있는가? 이 문제도 실은 ‘철학’의 의미가 밝혀졌을 때 답할 수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역학(易學), 사주(四柱), 명리(命理)가 하나의 온전한 학문인지 아닌지 여부는 여기서 상세히 고찰할 대상은 아니다. 다만 조선시대까지만해도 명리학이 과거시험의 한 분과인 잡과(雜科)에 포함되었던 과목이라는 점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의학이 많은 학생들의 선망 학과가 되었듯이 명리학도 미래에 정식과목으로 채택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명리학을 초등학교부터 의무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역설하는 유명 작가도 있고, 정통 동양사상을 전공하다가 명리학을 하나의 온전한 학문체계로 인식하고 관련 논문도 발표하는 동시에 전업 역술인으로 활동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데 철학이 사주명리학과 관련을 가진 것, 또는 관련을 가진다고 생각되기 시작한 것은 유래가 있다. 1960년대부터 우리 사회에 근대화 운동이 불같이 일어날 때 과거 전통의 많은 부분이 ‘미신’으로 간주되면서 된서리를 맞았다. 점을 보는 것도 그 중 하나였고 역술인들은 ‘점집’이라는 간판을 내리고 다른 단어를 찾아내야 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이 때 등장한 단어가 바로 ‘철학’이다. 그래서 무수히 많은 ‘철학관’ 또는 ‘철학원’이 나타난 것이다. 또는 점집이 철학관으로 포장을 바꾼 것이다.
철학이란 단어의 여러 의미를 언급했는데, 아직도 사전적인 의미로는 ‘철학’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어 보인다. 철학이 무엇인지 실마리를 풀어보기 위해서는 ‘철학’이란 단어 자체의 형성에 유래가 있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동방에 ‘철학’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물론 ‘밝다’라는 뜻의 哲과 ‘배움’의 뜻을 가진學은 당연히 있었지만, 두 글자를 합해서 하나의 단어로 만들고 특정 분과학문의 이름으로 사용된 적은 없었다. 서양에서 ‘철학’을 의미하는 단어 philosophia를 일본 메이지 시대의 학자가 ‘철학’(哲學)이라는 단어로 옮겼다. 네덜란드에서 유학한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가 ‘철학’의 작명자다. 이것이 동방에서 사용하는 ‘철학’이라는 단어의 기원이다. 오늘날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에서도 ‘철학’이라는 단어가 통용되고 있지만, 이 단어가 서양어의 번역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 장(章)에서 동양과 서양의 만남에 대해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겠지만,서양인들이 동양에 오기 시작한 것은 1500년대 후반부터다. 이미 400년을 훌쩍 넘어선 긴 역사다. 가톨릭 종교를 전파하려고 서양 선교사들이 동방에 와서 동서교류가 이
루어진 역사는 평생 연구해야 할 풍요롭고 방대한 주제다. 그런데 서양선교사가 philosophia를 중국인들에게 전하려다가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니시 아마네 등의 일본인들이 서양학문을 습득하는 차원에서 수많은 단어를 개발한 것은 분명 높이 살 만하지만, ‘철학’의 의미를 깊이 파악하려면 서양선교사들이 philosophia를 ‘哲學’ 같은 용어로 불분명하게 옮기지 못하고 고민한 사실을 오히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서양선교사들은 결국 philosophia에 해당하는 중국어를 찾지 못하고 중국발음을 빌려 표현하기로 했다. 그래서 ‘필-로-소-피-아’를 발음하기 위한 5글자 또는 5음절이 필요했다.
선택된 글자들은 ‘비록소비아’(斐祿所費亞)였다.1) 오늘날중국어에서 Coca Cola(코카콜라)를 ‘크어코우크얼러’(可口可乐, ke kou ke le)로 음역하듯이 예수회 선교사 알레니(Giulio Aleni, 1582-1649)가 라틴어 philosophia를 ‘페일루쑤오페이야’(斐祿所費亞 fei lu suo fei ya)로 음역한 것이다. 서양에서 통용되는philosophia에 해당하는 단어가 중국 학문에는 없다고 판단하여 음역을 한 것이라고봐야 한다. 서양 고유의 용어를 한자로 옮기기 위해 서양 선교사들이 고민한 사안은 이외에도 많다.
16세기 말 선교를 위해 중국에 도착한 예수회 신부들이 오늘날 통용되는‘신(神)’에 해당하는 ‘Deus’를 한자로 옮기기 위해 고심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상제, 천, 혼, 리, 태극(太極) 등 여러 단어가 후보에 올랐다가 결국 ‘천주’(天主)가 채택되었다. 마테오 리치의 동료 신부들은 그들과 교류했던 중국 청년이 판자 위에 써놓은 ‘天主’를 보고 적합한 단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Deus’의 번역어로 채택했다.
만일 ‘태극’이 선택되었다면 가톨릭은 천주교가 아니라 ‘태극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천주’가 선택된 이후 ‘천주’라는 번역어의 적합성 여부를 둘러싸고 유럽 학자들사이에 지루한 논쟁이 이어졌다. 이 같은 언어 논쟁 및 제사와 관련된 논쟁까지 겹
쳐지면서 서양과 중국 간에 갈등이 빚어지고 정치적 쟁점으로 변해갔다. 결국 ‘전례논쟁’이라 불리는 이 갈등은 중국 황제와 로마 교황청 간의 대립으로 확대되고북경에 설립된 예수회가 해체되는 결과까지 낳았다.
‘철학’이 그리 단순한 내용을 표현하는 용어가 아니라는 점은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철학’이라는 용어는 타당한가? 여기서 새삼 언어적 논쟁을 장황하게 불러일으킬 의도는 없다. 이는 근대시대에 일본을 통해 걸러진 학문용어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질 수 있고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미궁이 될지도 모른다.
철학과 관련하여 최근 국내 학계에서변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철학’이라는 단어에 수험생들이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 등으로 대학의 ‘철학과’가 명칭을 바꾸는 경우가 잦다. 그래서 철학과와 다른 과를 통폐합하여 ‘문화콘텐츠학과’ 등의 묘한 단어들로 새로운 학과의 명칭을 정하는 움직임도 보인다.
일반적으로 기존 철학 전공자들은 ‘철학’ 자체의 순수성과 독립성을 강조하면서 이런 움직임에 저항하는 기류가 강하다. 물론 서양철학, 동양철학, 중국철학, 한국철학, 인도철학 등 자연스럽게 ‘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왔기 때문에 ‘철학’을 하나의 실체로서 규정하고 순수학문으로서 고수하려는 입장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철학’이 서양 학문의 philosophia라는 특수한 명칭을 번역하려고 일본인들이 조합한 단어라는 점은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고민해보아야 한다. 만일philosophia가 서양 특유의 관점을 내포한 학문이라면 사태는 정말 심각해진다. 이 경우 동양철학, 중국철학, 한국철학 등의 용어는 문화적 간극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기묘한 복합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이라는 용어의 기원인 philosophia는 무슨 뜻인가? 일반적으로 서양에서 철학입문과정을 가르칠 때면, philosophia라는 단어는 희랍어의 어원을 통해서 설명하게 마련이다. philosophia는 ‘사랑하다’라는 뜻의 philein과 ‘지혜’ 또는 ‘지식’이라는 뜻의 sophia가 결합된 단어다. 따라서 philosophia는 ‘지혜 또는 지식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서양에서 철학을 정의할 때 강조하는 것은 철학은 지혜의소유가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욕구라는 점이다. 그래서 철학은 지혜나 지식을 이미 소유한 상태라기보다는 그것을 추구하고 탐구하는 활동이다. 지혜나지식을 소유한 사람은 확고한 답을 찾은 사람이기 때문에 더 이상 탐구를 하지 않을 것이고 타인에게 자신의 지식을 가르치고 나아가 강요하는 사람일 것이다. 이런 사람은 오만한 사람이다. 이와 달리 진정한 철학자는 이미 지식과 지혜를 소유했다고 단언하지 않고 겸허하게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지혜와 지식의 관계는 무엇인가? 둘은 동일한 것인가? 분명 지혜를 뜻하는 sophia는 ‘지식’의 뜻도 가지고 있다. 서양에서도 이 두 단어는 구분되어 사용되는 경우도 있고 동일시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지혜에 대한 물음에 대해 서양에서 처음으로 지혜는 곧 지식이라고 말한 사람이 소크라테스다. “지식과 지혜는 동일한 것이다.” 이 때 ‘지식’은 episteme다. ‘에피스테메’는 확립된 지식 체계를 의미한다. 이제 서양에서 철학의 방향은 정해진다. 철학은 사물들의 본질에 대한 지식, 세계 만물에 대한 전체적인지식의 추구가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지혜의 친구라고 말한 만큼, 답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하는 사람이다. 서양에서 소크라테스는 philosophia의 의미를 구현한 상징이다. 소크라테스가 아직 지혜에 도달하지 않았음을 인정한 것은 달리 말하면 지식을 갖지 못했다는 뜻이다.
서양철학의 대부인 소크라테스 가 바로 지혜와 무지의 경계에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즉 지혜의 친구로 규정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은 아무것도 확실하게 아는 것이 없다는 것 만을 안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겸허함을 무지(無知)의 지(知)라고 말한다. 그래서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철학의 모범으로서 평가된다. 그러나 지식의 추구에 묶여있는 철학자는 일상생활에서 서투르다.
플라톤은 철학자의 서투름을 변호한다. 스승의 부당한 죽음을 지켜본 플라톤은 정립되지 않은 견해(doxa)들이 부딪치는 세상을 넘어선 진리의 세계로 눈길을 돌렸고 일상의 경험 세계는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환상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하늘을 관찰하다가 우물에 빠진 탈레스를 놀리는 것은 범인(凡人)들의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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